억대연봉 석유화학, 어쩌다 '치킨게임' 휘말렸나 [테크토크]

 

억대연봉 석유화학, 어쩌다 '치킨게임' 휘말렸나 [테크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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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석유화학은 국내 제조업의 가장 중요한 대들보 중 하나입니다.
연간 450억달러(약 63조원) 이상의 가치를 수출하며, 수많은 산업단지를 먹여 살리는 산업의 쌀입니다.


그렇기에 현재 국내 화학 기업들이 겪는 위기가 더욱 혹독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중국발 과잉 생산의 파고를 넘어서고 있지만, 그다음에는 기술 혁신이 촉발한 근본적인 치킨 게임을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2018년부터 공급 과잉이었던 석유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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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산업의 과잉 공급 문제는 2018년에 이미 시작됐습니다.
당시 중국 기업들의 설비 가동률은 80%를 상회했고, 이들의 설비 투자 확대는 매년 800~900만톤(t)가량의 새 생산 능력을 추가합니다.
시장이 감당 가능한 양보다 훨씬 많은 화학 제품이 납품되면서 가격은 내려가고, 이 때문에 한국 업체들의 마진까지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 석유화학산업이 겪는 위기는 생산 과잉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2010년대 초부터 개발된 COTC(Crude Oil To Chemical·석유-화학 통합) 플랜트가 곧 대거 들어설 예정입니다.
이 기술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가격 경쟁은 더욱 가혹해질 위험이 있으며, 오직 치킨 게임을 버텨낸 기업들이 시장을 과점하는 승자 독식 체제가 완성될 수도 있습니다.


中·중동이 주도하는 COTC 쓰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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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TC는 석유 원유를 곧바로 석유화학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을 뜻합니다.
보통 석유 산업은 크게 업스트림(원유 시추)과 다운스트림(정유 및 각종 석유화학 제조)으로 나뉘어 있지요. 으레 우리가 생각하는 석유는 사실 그것 자체로는 크게 쓸모없습니다.
정유해서 연료로 만들거나, 혹은 남은 부산물을 분해해 석유화학 제품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팔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스팀 크래킹'이라는 기술을 이용해 석유화학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공정을 거치려면 원유에서 정제한 고분자 탄소화합물 '납사(나프타)'를 원료로 써야 합니다.
하지만 COTC는 납사 정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원유를 그대로 석유화학 제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보통 정유 공장과 스팀 크래커를 하나로 합쳐 운용함으로써 해당 공정을 실현합니다.


韓 샤힌 프로젝트 9조 vs 사우디 COTC 128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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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2014년 싱가포르에 첫 COTC 플랜트가 시운전된 뒤로, COTC 기술은 10여년 간 연구됐습니다.
COTC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수율입니다.
스팀 크래킹 만으로는 기초유분의 생산 비율이 기껏해야 8~10%이지만, COTC는 무려 50~80%에 이릅니다.
똑같은 양의 원유에서 뽑아낼 수 있는 화학제의 양은 물론, 운임 등 부가 비용 측면에서도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나 COTC는 어마어마한 초기 투자 비용을 요구합니다.
이 때문에 대규모 COTC 투자를 단행할 수 있는 나라는 거대한 자국 수요가 있는 중국, 그리고 콘덴세이트를 비롯한 다양한 원유를 직접 뽑아 올릴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였습니다.
실제 현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선 8개의 COTC 플랜트가 한 번에 올라가고 있는데, 프로젝트 비용이 무려 910억달러(약 128조원)에 달합니다.


한국도 COTC 투자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국내 첫 COTC 플랜트가 될 예정인 에쓰오일 '샤힌 프로젝트'죠. 샤힌 프로젝트의 투자 규모도 국내 석유화학 역사상 최대 규모인 9조2580억원이지만, 현재 COTC 분야를 주도하고 있는 중동이나 중국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림자 드리우는 치킨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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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서로 대립하는 집단들이 한 치의 양보 없이 돌진하는 양상을 '치킨 게임'이라고 합니다.
이미 과잉 공급 문제를 겪고 있는 석유화학 시장에 COTC 플랜트까지 가세함으로써, 중국과 중동이 벌이고 있는 치킨 게임은 글로벌 공급망 자체를 격변할 위험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저가 공세를 펼치고 있는 중국발 화학 제품은 더욱 저렴해질 테고, 한때는 업스트림에만 있었던 중동 국가들은 이제 다운스트림 영역까지 파고드는 태세이니까요.


치킨 게임은 한국에서도 익숙한 용어입니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200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어진 '메모리 치킨 게임'의 결과 지금 같은 위치에 올라서게 됐으니까요. 공정 기술의 혁신으로 메모리 가격이 급락하면서 수많은 해외 메모리 기업들이 파산하거나 다른 기업과 합병했고, 그 과정에서 빈 시장 점유율을 삼성전자·SK 하이닉스가 끌어오며 현재의 '메모리 강국' 한국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런 치킨 게임이 이제 석유화학 산업에서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글로벌 석유화학 산업의 규모는 반도체 및 통신 산업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그 파급력이나 중요성은 더 클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번엔 쓰러져 사라질 '치킨'들 중 한 마리가 우리일지도 모른다는 데 있겠지요.



임주형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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