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선포 여파가 산업계를 뒤흔들면서 내년 경영 환경이 최악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미·중 패권 경쟁 과열, 트럼프 리스크, 중국의 저가 공세 등 복합 악재가 쌓여있는 상황에서 재계는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평가하고 대책 마련에 나선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경영계가 공격적인 투자보다 단기적으로라도 관리 위주의 소극적 행보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내수가 부진한 상황에서 기업들 투자마저 위축되면 내년도 우리 경제 어려움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5일 산업계에 따르면 주요 기업들은 최근 투자 계획을 다시 살펴보는 등 내년도 사업계획 수정을 검토하고 나섰다.
주요 그룹 한 고위 임원은 아시아경제와의 통화에서 "비상계엄 관련해 내부 회의를 진행했는데, 내년 투자계획도 들여다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면서 "상황에 따라 조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과 SK, LG 등 주요 기업들은 주력 사업에 대한 시나리오별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
기업들이 투자계획을 다시 살피는 건 계엄 이후 탄핵 국면이 새롭게 펼쳐지면서 조기 대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원전 등 현 정부에서 강력하게 미는 사업이 내년에 자칫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는 얘기다.
이미 기업들은 내년도 투자 계획을 보수적으로 잡은 상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최근 발표한 '2025년 500대 기업 투자계획 조사'에 따르면 양적인 면에서 내년도 투자를 늘리지 않겠다는 기업이 대부분(87.2%)이었고, 질적 측면에서도 소극적인 유지·보수를 택한 기업이 다수(77.8%)였다. 내년 글로벌 경기가 올해보다 소폭 둔화할 것이란 전망과 함께 보호무역주의 심화에 따른 글로벌 교역 위축 등으로 투자 감소를 예고했는데, 정치 리스크가 추가되면서 기업들이 더욱 허리띠를 졸라맬 상황이 된 것이다.
특히 이차전지 기업들은 내년 투자를 더욱 보수적으로 편성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 설비투자가 정점을 찍으면서 외화부채가 크게 늘어난 상황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3분기 기준 6조8000억원대 외화 부채를 기록했고 SK온의 외화부채는 3조4379억원을 기록했다. 삼성SDI도 올해 설비 투자 규모를 지난해보다 대폭 늘리면서 향후에는 고환율로 인한 손해를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와 자동차 등 미국에 수십조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한 주요 제조 기업들은 국내보다 해외 추가 지원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내년 1월 미국 새 행정부가 출범하면 보조금 축소 및 관세 확대 등에 대한 정보 공유와 대응이 필요한데, 정부 차원의 외교력 지원과 협상력이 약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개최를 추진 중인 만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국내 기업들의 입장을 전달할 기회가 있을 것이란 기대를 했다"며 "정상외교가 불가능해진 것 같아 관세 인상, 보조금 축소 정책 등을 밀어붙인다면 속수무책이 되지 않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철강, 석유화학 등 업황이 어려운 산업은 정부 차원의 사업 경쟁력 강화 방안이나 지원책 발표가 줄줄이 미뤄질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다. 이들 업종은 그동안 정부와 '민관 원팀'을 강조해온 만큼 충격이 크다.
특히 구조조정 지원책에 대한 기대가 컸던 석유화학 업계는 계획 발표가 지연되면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당초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달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석유화학 업계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핵심 내용인 저리(低利) 정책금융 지원, 세제 혜택 등이 기재부 소관 사항인데 국무위원 사퇴 표명으로 예정대로 진행될지 예측이 불가능해졌다.
석화업계 관계자는 "늦어도 내년 1~2월에는 대책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번 사태로 이마저도 불투명해졌다"며 "아예 대책이 백지화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든다"고 전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석유화학 문제는 기업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와도 관련돼 있다"며 "석유화학 비율이 높은 산단 지역 경제를 위해서도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철강업계 역시 중국산 저가 후판에 대한 반덤핑 조사에 영향이 없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대제철은 중국산 제품으로 국내 기업이 경쟁력을 잃자 단독으로 중국산 후판에 대한 반덤핑 제소를 신청한 상황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조업 등 사업장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진 않지만, 반덤핑 조사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 등 수입품에 대한 강력한 관세 부과 가능성이 예고되면서 수출기업들에도 악재가 드리울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대통령 탄핵 소추 절차에 들어서게 되면 최소 3개월간 리더십 공백이 불가피하다"며 "특히 통상 문제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한데 지금 상황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국내외 정치적 변동성만큼 기업들이 불안해하는 요소가 없다"며 "대통령 탄핵이든 직무 정지 여부든 빨리 결정이 돼서 관련 대비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는 게 더 낫다"고 지적했다.
오현길 기자 [email protected] 한예주 기자 [email protected] 정동훈 기자 [email protected] 이성민 기자 [email protecte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