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자동차 회사 포드(Ford)의 경영진은 일본 자동차 회사 마쓰다(Mazda)에 관한 자료를 살피던 중 충격에 빠졌습니다. 마쓰다의 회계조직은 모든 외상매입금 처리를 비롯해, 주요 회계 업무를 5명이서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포드의 회계 부서는 어땠을까요. 무려 500명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미국 자동차 업계는 일본차 업체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있었습니다. 기술력에서 밀리는 것은 물론, 관료화된 조직이 만들어내는 업무 프로세스의 비효율도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부품 재고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재고 관리가 엉망이었죠. 필요한 물품, 불필요한 물품의 재고가 들쑥날쑥이었습니다. 공급업체 관리도 체계적이지 못했습니다. 품질 관리 측면에서도 일본 경쟁사들에 비해 뒤처져 있었죠.
회계부서의 문제는 특히 심각했습니다. 하나의 대금 지불을 처리하는 데에만 14단계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죠. 각 단계마다 문서 처리와 확인 작업이 반복됐습니다. 각 단계가 빠르게 처리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곳곳에서 병목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서류 분실과 오류마저 빈번했습니다.
마쓰다의 믿기지 않는 효율성에, 포드는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신기술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컴퓨터입니다.
일본차를 넘어서기 위한 포드의 신기술 : 컴퓨터
당시 컴퓨터는 혁신적인 신기술로 여겨졌고, 포드 외에도 많은 기업이 앞다퉈 사무실의 컴퓨터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앞서(3회차) 살펴봤듯, 대부분의 기업은 기대했던 극적인 생산성 향상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포드 역시 마찬가지였죠. 포드의 회계부서는 구매 주문서, 납품 확인서, 송장 등을 수동으로 대조하는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프로세스에 여전히 얽매여 있었습니다. 부서 간 의사소통 부족으로 업무 지연, 오류 발생률 등은 도저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죠.
새로운 설비에 막대한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미미했습니다. 사무실을 가득 채운 커다란 컴퓨터는 '돈 먹는 하마'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동화하지 마라. 그냥 없애라!" : 리엔지니어링 기법 이런 가운데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이라는 경영 혁신기법이 등장합니다.
제임스 챔피(James A. Champy)와 마이클 해머(Michael Hammer)는 1990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야심 찬 논문 한 편을 발표합니다. 제목은 ‘리엔지니어링 작업(Reengineering Work: Don't Automate, Obliterate)’ 입니다. 이들은 논문에서 "현대 정보기술(IT)의 힘을 이용해서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하고 성과를 극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재설계를 하라는 말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부제로 설명됩니다. 업무를 단순히 "자동화하는 것이 아니라(Don’t Automate), 없애라(Obliterate)"는 것이죠.
기업 내 존재하는 복잡한 작업 프로세스를 없애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최신 정보 기술을 접목해봐야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 챔피와 해머의 핵심 주장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기업은 컴퓨터와 IT 시스템을 '업무 자동화' 수단으로만 인식하고 있었죠.
하지만 챔피와 해머가 보기에 그 기술들의 진정한 힘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낡은 프로세스를 단지 효율화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낡은 규칙을 깨뜨리고 새로운 방식을 창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리엔지니어링은 리스트럭처링(Restructuring)과는 접근 방식이 달랐습니다. 리스트럭처링이 기존 조직 구조에서 부분적 개편에 초점을 맞췄다면, 리엔지니어링은 업무 프로세스를 백지상태에서 재설계하는 셈이었죠.
리스트럭처링은 인원 감축과 재무비용 절감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곤 합니다. 반면, 리엔지니어링에서는 인원 감축과 비용 절감이 업무 프로세스 개선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리엔지니어링 과정에서 만약 불필요한 프로세스가 있었다면 당연히 잘라내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새로운 프로세스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오히려 인원이 늘어날 수도 있는 거죠. 리엔지니어링은 인원 감축의 문제가 아니라,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는 문제입니다.
포드는 이러한 리엔지니어링 접근법을 회계 부서에 적용했습니다. 먼저 업무의 목적과 목표를 명확히 정의했죠. 그 후, 프로세스를 분석하여 불필요한 단계를 제거하고 핵심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재설계했습니다. 복잡했던 14단계의 지불 처리 과정은 단 3단계로 간소화됐습니다.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문서 처리를 자동화했고, 공급업체와의 전자결제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구매 부서와 공급업체 간에 전자 데이터 교환 시스템을 구축하고 구매 주문서와 납품 확인서, 송장을 자동으로 처리하도록 했죠.
그 결과 어땠을까요. 포드는 회계 부서의 인력을 무려 75%나 줄일 수 있었습니다. 인력 감축에도 불구하고 업무 처리의 정확성과 효율성은 오히려 크게 향상됐습니다. 단순한 자동화가 아닌, 업무 프로세스의 근본적인 재설계를 통해 얻은 성과였죠.
AI가 업무 프로세스에 미치는 영향 : 단계별 중요성이 달라진다
좀 더 가까운 사례로 살펴보죠. 이달 말부터 수능 정시 접수가 시작됩니다.
입시철 대학의 핵심적 업무 프로세스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학홍보, 합격자 뽑기, (타 대학으로 갈 수 있는)합격자 붙잡기입니다. 한 대학이 AI를 활용한다고 가정해보죠. 지원자의 학부 성적, 경력, 추천서 등 각종 데이터를 바탕으로 뛰어난 인재를 빠르게 가려내는 겁니다.
기존의 입학 심사는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고비용 프로세스였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많은 원서를 받는 게 능사는 아니었습니다. 서류 더미 속에서 진짜 중요한 인재를 놓칠 위험도 컸죠. 그러나 AI가 1차 심사를 진행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합격자를 더 빨리, 더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다는 말은, ‘합격자 뽑기’ 프로세스의 비용(인력, 시간, 리스크 등)이 줄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 큰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게 된다면, 앞으론 더 많은 원서를 받는 게 가능해집니다. 자기 대학에 합격할 가능성이 있는지, 허수인지, 아니면 합격하더라도 다른 대학으로 갈 가능성이 높은 지원자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서를 최대한 걷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그러면 이 단계는 원서 수익을 늘릴 수 있는 기회로 바뀌게 됩니다. 프로세스의 성격 자체가 바뀌게 된 것이죠. 앞으론 마케팅 비용에 더 투자를 감행할 수 있게 됩니다. ‘입학 홍보’ 단계의 기능과 중요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셈이죠.
또한 합격자를 빨리 추려낼 수 있으므로, 그렇지 않은 다른 대학에 비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늘어납니다. 아울러 합격자 중 누가 남을지 확실히 예측할 수 있게 된다면, 장학금과 각종 인센티브를 적정하게 산정하는 일의 중요성이 커집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인력이 투입될 수도, 새로운 조직이 생겨날 수도 있죠. 절약된 시간과 자원은 가장 필요한 영역으로 재투자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AI의 도입과 함께 기존 '입학 홍보→ 합격자 선정 → 붙잡기'의 프로세스에서 각 단계마다 해야 할 일, 즉 목표가 달라집니다. 각 단계의 중요성도 달라지는 것이죠.
AI혁명은 기존 조직과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AI는 업무 프로세스를 단순화할 수 있고, 혹은 불필요해진 프로세스를 아예 제거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중요성이 새로 생겨난 업무와 역할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AI를 업무에 도입하려는 CEO나 조직장은 포드의 실패와 리엔지니어링의 사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AI라는 신기술을 도입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존 업무에 AI를 끼워 넣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단순히 기술 부서를 강화하거나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요구합니다. 조직의 목표를 재검토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격변의 시대에 가장 위험한 건 격변 그 자체가 아니다. 과거의 논리로 행동하는 것이다 (The greatest danger in times of turbulence is not turbulence itself, but to act with yesterday’s logic)." 경영학의 전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의 말입니다. AI의 시대에도 간직하고 있어야 할 시대의 통찰입니다.
다음 연재 예고⑤우리는 왜 공항에서 시간을 낭비할까 (12월7일) ⑥"우리도 그 AI로 뭐 좀 만들어봐"라는 상무님(12월8일) ⑦스티브 잡스가 뿌린 AI혁명의 씨앗(12월16일)
편집자주인공지능(AI)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됐습니다. 각종 상품·서비스 홍보에 AI가 안 붙는 경우가 없다시피 합니다. 직장인들도 힘듭니다. "야, 우리도 AI로 뭐 좀 만들어봐" 회사에서 쉽게 요구하는 이런 말 때문에요. AI만 있으면 뭐든 대박이 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AI의 세계는 무수한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소위 AI로 대박 친 기업들은 0.1%의 사례에 불과합니다. 99.9%의 기업과 서비스는 실패했죠. 그러나 성공으로 가는 빠른 길 중 하나는 실패에 대한 연구입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99.9%의 실패를 살펴보는 것은 0.1%의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AI 오답노트' 연재물은 AI와 관련된 제품과 서비스, 기업, 인물의 실패 사례를 탐구합니다.
김동표 기자 [email protecte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배포금지> |